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문학 작품 같은 제목과 어울리듯 영화 자체도 굉장히 문학적이다. 18세기의 배경과 어울리는 문학적인 대사들, 그림들, 화풍, 인물들이 입은 옷까지 이 영화의 장면 장면 모두가 한 작품의 그림 같다. 뛰어난 명화를 촬영해서 이어 붙인 영화라는 느낌이 든다. 영화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마리안느라는 여성 화가가 엘로이즈네 집에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6일간 머무르게 된다. 엘로이즈는 수녀원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했는데, 언니의 죽음으로 결혼을 하게 되어 집에 돌아온 인물이다. 엘로이즈가 거부하여 초상화를 못 그리고 있었는데 마리안느는 엘로이즈 몰래 초상화를 그리게 되는 임무를 맡는다. 산책 친구라는 타이틀을 건 채로. 그렇게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매일 엘로이즈와 함께 산책하며 서로를 알아가게 되는 내용을 담았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를 보며 가장 초점을 맞춘 부분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
1. 영화 안에 남성 인물이 없다.
내가, 혹은 우리가 지금껏 봐왔던 영화들은 주로 남자 주인공으로 전개되는 영화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액션 영화라던가, 누아르, 로맨스 영화에서도 남자주인공은 필수이기에. 이 영화에서는 남자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굳이 따져보자면 맨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그리고 자잘하게 몇 번 등장하는 것이 전부다. 오히려 남성 인물이 등장하기 않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나 싶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이런 영화란 잔잔하고, 감정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별다른 소음 없이도 감정의 고조를 나타낼 수 있는 영화. 그로써 여성영화의 힘을 입증했다는 듯이. 매우 파격적인 설정을 통해 나와 비슷한 여성들은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2. 18세기 시대극이라는 배경을 탈피한 설정.
저택의 아가씨인 엘로이즈(아델 하에넬)와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마리안느가 "감히 아가씨께"이런 비슷한 대사를 뱉었다. 그리고 엘로이즈는 말한다. 우린 동등하다고. 철저한 계급 사회 속에서 계급을 없애고 둘은 서로를 더 알아간다. 이 대사가 유독 인상깊었다.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덧붙이자면 마리안느는 마지막 장면쯤에 자신이 엘로이즈를 만났던 바다를 배경으로 오이디푸스 신화를 그린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품한다. 이 상황으로 알 수 있듯 그때 당시 여자가 그림을 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였던 것이다. 더불어 소피(루아나 바야미)라는 인물이 충격적이다. 소피는 엘로이즈 집 하녀인데, 의도치 않게 임신하게 되고,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소피가 유산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낙태가 어찌 보면 현실사회까지도 금기화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을 넣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여성을 위해 만들었다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3. 오이디푸스 신화를 통한 주제 관통.
영화 중반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는 부엌에서 엘로이즈가 책을 읊는다. 오이디푸스 신화 이야기였다. 소피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듣고 분노한다. "뒤 돌아보면 안 됐죠." 그러자 마리안느는 대답한다. "오이디푸스는 사랑이 아닌 시인의 삶을 택한거야." 이 신화로 인한 마리안느의 대답은 후반부 장면으로도 이어진다. 결혼을 해야 했던 엘로이즈를 두고 마리안느가 초상화를 다 그리고 집을 나가려고 하자 엘로이즈는 " 뒤 돌아봐."하고 마리안느는 뒤를 돌아 엘로이즈를 보고 떠난다. 마리안느도 결국 사랑을 택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삶을 택한 것이다.
4. 영화에 노래가 총 두 곡 등장한다.
이 영화는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흔히 말하는 ost가 없이 진행된다.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는 장작불 타는 소리, 집 안을 걸어다니는 소리, 파도 소리가 끝이다. 그 사이에서 노래가 딱 두 곡 등장하는데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소피가 마을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닥불 앞에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아카펠라 노래가 첫 곡이다. 마을의 여자들이 모여 처음에는 무서운 음악이라고 생각되었다가 갑자기 소리가 커지며 아카펠라 노래를 부른다. 정은채 x이은선 기자 gv에 따르면 이 노래의 가사가 "우리는 탈출할 수 없다."라는 라틴어라고 한다. 여러모로 그들이 탈출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함께 있는 오케스트라 극장에서 비발디의 사계 부분이 틀어진다. 이 곡은 중간에 마리안느가 엘로이즈한테 아는 부분을 피아노로 조금 쳐주는 것에서 비롯됐다. 이 마지막 장면이 유독 인상 깊은 이유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이라는 독백에서 비롯되고, 그녀가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영화가 끝이 나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의 나의 생각은 "영화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였다. <서치>를 봤을 때도 이 생각이 나긴 했는데 그것은 기술적인 문제였다. 이 영화는 촬영 구도, 색감, 노래 면에서 특히 그렇다. 모든 장면이 아름답고, 그림 같아서 더욱더 아름다웠는데 정체를 숨긴 화가가 몰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이야기와 너무나도 잘 맞물려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장면은 마리안느, 엘로이즈, 소피가 풀을 줍는 장면이었다. 맨 처음에 하늘색 하늘을 바탕으로 아이보리색 풀들이 가득한 장면에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일어서면서 풀을 뽑고 있다고 알게 된 장면. 언젠가 그 장면이 담긴 엽서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장면 장면 다시 생각하게 하고, 다시 생각할수록 "이런 의미였구나."싶은 장면들이 많아 더욱더 멋진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실험적이고 이런 영화가 있을 수 있을까? 싶은 영화인데 앞으로 이런 영화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미디어 속에서, 영화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소비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여성영화제 서포터즈를 했던 경험 덕분에 이 영화를 여성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 의미가 깊었다.
새롭게 알게 된 용어들을 첨부한다.
메일 게이즈(male gaze) : 남성의 시선
In feminist theory, the male gaze is the act of depicting women and the world, in the visual arts and in literature, from a masculine, heterosexual perspective that presents and represents women as sexual objects for the pleasure of the male viewer.
Bechdel Test(백델 테스트) : 영화의 성평등 평가 방식
1.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둘 이상 등장한다.
2. 여성들이 서로 이야기를 한다.
3. 이야기의 주제가 남자에 대한 것 이외이다.
참고할 만한 링크 1
정은채x이은선 기자의 gv를 참고해서 리뷰를 썼다. 1시간가량인데 8분 30초부터 50분 정도까지 해설이 진행된다. 물과 불을 많이 배치한 영화 속 이야기, 오이디푸스 신화의 뜻 등등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셨다면 gv도 보는 것을 추천드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zzspLvpCvhw
참고할 만한 링크 2
18분부터 영화의 하이라이트 음악이 나온다.
참고할 만한 링크 3
마을의 여자들이 모여 부른 아카펠라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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